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산 왕조 (문단 편집) == 사회 == 문서 최상단의 지도에 나와 있듯이 사산 왕조의 평상시 영역은 현대 이란+이라크 국경에서 동-서로 조금 늘어난 수준이다. 수도인 [[크테시폰]]이 영역의 서쪽 끝부분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사산 왕조 인구의 상당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자원을 확보 가능한 이란 남서부~남부(후제스탄, 파르스, 케르만), 북서부~북동부(하메단, 레이, 호라산, 마잔다란)의 산간 및 고원 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막]] 혹은 [[건조기후]]대이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넓은 영토에도 인구는 700만~800만[* 심지어 이 인구도 400만이던 파르티아 시절보다 2배로 증가했는데도 열세였다. 호스로 2세 시기 동로마(비잔티움)의 영토를 병합했을 때에는 2,500~3,000만 정도. 물론 동로마의 반격으로 다시 영토를 빼앗기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 이란의 국력은 상당 부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왔기에, 통합된 [[로마 제국]]은 물론이요, [[동로마 제국]]만으로도 인구와 경제력에서 이란을 압도했다.[* 통합 로마제국은 인구 5,600만이고, 사산조와 싸울 때의 동로마 제국은 최전성기로 인구가 2,600만이었다. 한마디로 7배, 3배가 넘는 강적들과 싸웠던 것.] 특히 페르시아의 적들은 동로마만 있는 게 아니라 중동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노리는 아랍인과 투르크인, 이란계 유목민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틈만 나면 이란을 공격하고 약탈했기에 그들과도 맞서야 했다. 따라서 더 부유하고 강력한 적국과 인접한 곳에 수도와 인구, 농업 생산력 등 모든 것이 몰려 있는[* 이는 이란 땅이 척박하여 인구 부양력이 낮다보니 근대까지 인구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를 제외한 이란 지역은 몽골의 대학살 이후에는 인구가 250만까지 추락했는데 원래 이란계 민족이 주로 살던 [[호라산]](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일대) 주 사용 언어가 이란계에서 튀르크계 언어로 바뀔 정도였다. 근대 왕조인 [[사파비 왕조]] 때도 몽골 제국의 침략 당시 농경지가 상당부분 황폐화되고 이후 목초지로만 활용되는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해 인구가 고작 464만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란은 1920년대에 와서야 인구가 1,000만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에 들어 8,000만의 인구로 폭증하게 된 것은 오일머니 빨로 때운 인프라를 확충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란뿐만 아니라 다른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현재도 중동과 이란의 인구 격차는 여전한데, 아랍 국가들 전체의 인구가 4억 2천만이며 터키의 인구만해도 이란과 비슷한 8,000만이다. 다만 중동은 종파, 민족, 국가별로 분열이 심하지만 이란은 기본적으로 이란인을 중심으로 단결이 잘 된편.] 사산 왕조는 로마에 비해 훨씬 자기방어적이며 군사적인 사회로 발전했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인구 4,000만에 로마제국을 우습게 보는 초강대국이라고 썼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다.''' 사산조는 국력에서 로마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세였기 때문에 오히려 '''로마가 사산조를 침공하고 압박하는 정세였다.''' 사산조는 파르티아처럼 동로마와 싸울 때는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워야 했다. 로마가 사산조를 상대로 어지간히 애먹은 이유는 국력보다 보급 문제와 지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사산조의 수도를 두 번이나 파괴했다. 하지만 로마가 동•서 분리된 후에는 사산 왕조가 동로마에 대해 호각 이상의 전적을 유지했다.] 반면 로마는 수도가 아예 유럽에 있어서 이 전선과는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주 전선에서 수도에 이르는 종심이 페르시아가 로마보다 훨씬 짧았던 점은 [[이슬람 정복]] 당시 페르시아는 멸망했지만 로마는 타우루스 산맥을 경계로 하여 끝끝내 버티고 훨씬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차이로 드러나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shahrestan.jpg]] 그림 7 - 사산 왕조 말기 주요 도시와 지역들을 표시한 백지도. 제국의 인구 분포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출처: Touraj Daryaee 역, 《Šahrestānīhā-ī Ērānšahr》, P. 107[* 현재도 이란의 인구 분포는 사산조 시절과 비슷하다.]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르다시르 1세, 샤푸르 1세, 샤푸르 2세,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 등 도시 조영 사업에 힘썼던 황제들은 거의 대부분 메소포타미아와 그 인근 지역에 도시를 만들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물을 이용하기 위한 운하와 관개 시스템 구축 사업 역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파괴한 지 100여 년 뒤에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번영할 때까지 이어져서, 당시 바그다드는 수많은 운하와 도랑, 거대한 농경지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카나트]](Qanat)라는 지하 관개 수로를 이용해 최대한 넓은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